숲속의 썩은 나무나 낙엽 아래에서 노란색 점액질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입니다.
눈도 없습니다.
입도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뇌와 신경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생물은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가며, 복잡한 미로에서 효율적인 경로를 만들어냅니다.
더 이상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이전의 경험이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까지 관찰됐다는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오늘 탐험할 생물은 흔히 ‘블롭(The Blob)’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황색망사점균, Physarum polycephalum입니다.
01. ‘블롭’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이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Physarum polycephalum은 흔히 황색망사점균으로 불리는 점균류입니다.
하지만 이름 때문에 곰팡이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균류와는 다른 계통에 속하는 생물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성장 단계에서 나타나는 변형체(plasmodium)입니다.
[Physarum polycephalum은 흔히 황색망사점균으로 불리는 점균류]
이 단계의 블롭은 거대한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의 세포 안에 매우 많은 핵이 존재합니다.
즉, 우리가 멀리서 보면 여러 개의 세포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노란색 네트워크가 사실은 하나의 거대한 세포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세포에는 동물처럼 발달한 뇌나 신경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변 환경의 정보를 감지하고 몸의 구조를 변화시키면서 먹이를 찾아갑니다.
뇌가 없는데 어떻게 환경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요?
02. 블롭은 몸 전체로 주변을 탐색합니다.
블롭은 동물처럼 다리를 움직여 걷지 않습니다.
대신 몸을 이루는 세포질이 관 형태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세포질이 계속 흐르면서 몸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먹이가 있는 방향에서는 새로운 관이 뻗어나가고, 여러 경로를 탐색한 뒤 효율성이 낮은 경로는 약해지거나 사라집니다.
결국 블롭의 몸 자체가 하나의 탐색 시스템처럼 작동하게 됩니다.
연구에서는 이러한 네트워크 형성 과정이 먹이의 위치와 환경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효율적인 경로를 만들어내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됐습니다.
여기에는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지휘자가 없습니다.
뇌가 전체 경로를 계산해서 명령을 내리는 방식도 아닙니다.
대신 몸의 여러 부분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흐름과 화학적 신호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전체적인 행동이 만들어집니다.
말하자면 ‘중앙 통제 없는 문제 해결’에 가깝습니다.
03. 정말 미로를 풀 수 있을까?
블롭이 유명해진 가장 대표적인 실험 중 하나가 바로 미로 실험입니다.
2000년 발표된 연구에서 연구진은 Physarum polycephalum을 미로에 넣고 서로 다른 위치에 먹이를 배치했습니다.
블롭은 처음에는 여러 방향으로 관을 뻗으며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필요한 경로가 줄어들고, 두 먹이를 연결하는 효율적인 경로가 남았습니다.
연구진은 이 생물이 미로에서 최소 길이에 가까운 경로를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보고했습니다.
[블롭이 미로에서 경로를 만드는 모습]
여기서 흔히 “블롭이 미로를 생각해서 풀었다”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현재 연구가 보여주는 것
인간처럼 생각해서 미로를 풀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먹이와 환경의 차이에 따라 몸의 네트워크가 변화하면서 결과적으로 효율적인 경로가 형성되는 현상입니다.
즉, 놀라운 것은 블롭이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경계 없이도 복잡한 정보처리와 적응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04. 블롭이 만든 ‘도쿄 철도망’
블롭의 능력이 더욱 유명해진 실험이 있습니다.
연구진은 도쿄와 주변 지역의 주요 역에 해당하는 위치에 먹이를 배치하고 블롭이 이를 연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블롭이 만들어낸 관 네트워크는 실제 도쿄 철도망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보였습니다.
이 연구는 블롭이 복잡한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을 “블롭이 도쿄 지하철을 이해했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블롭은 철도가 무엇인지도, 도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먹이가 있는 여러 지점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흐름이 효율적인 경로를 강화하고 덜 사용되는 경로를 약화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사람이 만든 네트워크와 비슷한 구조가 나타난 것입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복잡한 두뇌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오히려 더 흥미로운 질문을 만들어냅니다.
05. 그런데 블롭은 ‘학습’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이야기가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2016년 발표된 연구에서는 Physarum polycephalum이 반복적인 자극에 익숙해지는 습관화(habituation) 현상을 보이는지 실험했습니다.
연구진은 블롭이 먹이에 도달하기 위해 기피하는 물질이 처리된 경로를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당 물질을 피하려는 반응을 보였지만, 같은 자극이 반복되자 점차 그 자극을 무시하고 이동하는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자극이 사라진 뒤에는 다시 기피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를 단순한 감각 피로나 운동 능력의 저하가 아니라 습관화라는 학습 형태로 해석했습니다.
학습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뇌와 신경세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블롭에게는 그런 구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학습’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06. 더 놀라운 질문, 블롭에게 ‘기억’이 있을까?
학습보다 더 논쟁적인 영역이 바로 기억입니다.
2021년 PNAS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블롭이 영양분을 만났을 때 몸을 이루는 관의 굵기가 변화하고,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이후의 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연구진은 이러한 관의 구조 변화가 과거에 영양분이 존재했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는 일종의 기억(memory)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가 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블롭에게는 뇌가 없습니다.
대신 자신의 몸을 이루는 관 네트워크 자체가 경험에 따라 변화합니다.
먹이를 만난 곳에서는 특정 관의 구조가 달라지고, 그 변화가 이후 세포질의 흐름과 이동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과거의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정보가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반드시 신경세포 안에 저장되어야만 할까요?
07. 한 가지 더.. 서로 학습한 기억을 공유한다?
여기까지는 한 블롭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보겠습니다.
마치 영화 속 외계 생명체처럼 말입니다.
서로 접촉하는 순간 한쪽이 가지고 있던 경험이나 정보가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생물.
영화에서는 익숙한 설정이지만 현실의 생물에게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블롭에게는 이 질문을 실제로 실험할 수 있는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서로 융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hysarum polycephalum에서는 세포와 세포가 접촉하면 서로 융합해 하나의 연결된 개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바로 이 특성을 이용해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08. 블롭은 서로 ‘배운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2016년 연구에서 연구진은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블롭을 준비했습니다.
한쪽은 특정 기피 물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익숙해진 블롭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그런 경험이 없는 블롭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블롭을 서로 융합시켰습니다.
놀랍게도 융합 이후에는 기피 물질을 경험하지 않았던 블롭에서도 적응된 행동이 나타나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더 흥미로운 실험에서는 학습된 블롭이 소수이고 학습되지 않은 블롭이 다수인 상태에서도 융합 이후 적응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세포 융합을 통한 학습된 행동의 전달로 해석했습니다.
즉, 한 블롭에서 형성된 적응 상태가 다른 블롭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 블롭이 경험한 것이 다른 블롭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같은 질문이 등장합니다.
블롭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걸까요?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연구에서 직접 확인된 것은 ‘기억의 복사’가 아니라 학습된 행동의 전달입니다.
연구진은 세포가 융합하는 과정에서 생리적 상태나 세포 내부의 여러 요소가 공유되면서 적응 반응이 전달될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처럼 특정 기억의 내용이 파일처럼 복사되어 전달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확인된 사실
학습된 블롭과 학습되지 않은 블롭을 융합했을 때 학습된 행동의 전달이 관찰됐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
그 행동 변화를 실제로 전달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블롭은 기억을 공유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과학적으로 지나친 표현입니다.
하지만 “한 블롭의 경험에 해당하는 적응 상태가 다른 블롭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실제 실험으로 다뤄진 과학적 질문입니다.
기억 공유처럼 보이는 현상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세포질 속 분자 신호일까요?
변화된 생리 상태일까요?
세포 내부에서 공유되는 어떤 물질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아직 ‘기억’이라고 부르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정보 저장일까요?
09. 하지만 ‘기억’이라는 해석에는 반론도 있습니다.
여기서 WONDER.DIVE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2021년 연구는 블롭의 관 구조 변화가 영양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이후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기억(memory)의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발표된 논평에서는 이러한 결론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관의 굵기가 변화하는 현상이 영양분에 대한 즉각적인 생리적 반응과 세포질 흐름의 변화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으며, 이를 반드시 ‘기억’이라고 부를 충분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입니다.
과학에서 중요한 구분
어떤 현상이 관찰됐다는 것과, 그 현상에 붙인 해석이 완전히 확정됐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현재 가장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블롭에서는 과거의 자극이 이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관찰됐으며, 이를 학습이나 기억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기억과 동일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10. 그렇다면 블롭은 생각하는 걸까?
여기에서 ‘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블롭은 미로를 탐색하고, 먹이의 위치에 따라 네트워크를 변화시키며, 불필요한 경로를 줄입니다.
반복적인 자극에 반응을 바꾸는 학습 현상도 관찰됐습니다.
심지어 서로 융합한 뒤 한쪽에서 형성된 적응 행동이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현상까지 보고됐습니다.
그렇다면 블롭에게 지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아직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비신경계 인지(non-neural cognition) 또는 분산된 정보처리라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나 동물의 의식적 사고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블롭이 무언가를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말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복잡한 행동이 반드시 뇌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11. 블롭의 몸은 하나의 계산 시스템일까?
블롭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원리가 보입니다.
여러 갈래의 관이 만들어지면 각 관을 흐르는 세포질의 양이 달라집니다.
많이 사용되는 경로는 더 강해지고, 사용되지 않는 경로는 약해지는 방향으로 네트워크가 재구성됩니다.
결과적으로 블롭은 환경을 탐색하면서 자신의 몸 자체를 계속 수정합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Physarum의 행동을 최적화 문제나 네트워크 설계 문제에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블롭의 성장 원리를 이용해 교통망이나 네트워크를 설계하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블롭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산과 비슷한 결과를 자신의 물리적 구조 변화만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블롭의 네트워크 형성 원리를 컴퓨터 네트워크 또는 교통망과 비교]
12.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여기서 잠시 처음의 영화 같은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외계 생명체 두 마리가 서로 접촉합니다.
그리고 한쪽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 다른 쪽으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 파일이 복사된다’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생물학에서 정보가 전달되는 방식은 훨씬 복잡합니다.
블롭의 사례에서도 우리가 확인한 것은 파일처럼 저장된 기억이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복사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세포가 융합하면서 내부 환경과 신호 체계가 변화하고, 그 결과 이전에 학습하지 않았던 개체에서도 특정 행동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상을 바라보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은 ‘블롭에게 인간과 같은 기억이 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과거의 경험이 세포의 구조와 화학적 상태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이후 행동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정보가 남아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상태가 다른 세포와의 융합을 통해 전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디까지 ‘기억 공유’라고 불러야 할까요?
13. 생각해볼 점 — 기억에는 정말 뇌가 필요할까?
이 생물을 바라볼 때 ‘블롭이 정말 똑똑한가?’라는 질문보다 조금 다른 질문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과 학습을 뇌의 기능으로 이해해왔습니다.
하지만 블롭의 사례는 과거의 경험이 이후 행동에 영향을 주는 현상이 반드시 신경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을 인간의 기억과 같은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억’과 ‘인지’라는 단어를 너무 인간 중심적으로 정의해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14.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블롭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답하지 못한 질문이 많습니다.
• 신경계가 없는 세포는 환경 정보를 어떻게 통합할까요?
• 습관화와 같은 학습은 세포 내부에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발생할까요?
• 관의 구조 변화는 어느 정도까지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 서로 다른 블롭이 융합했을 때 학습된 행동은 정확히 어떤 생물학적 경로를 통해 전달될까요?
• 세포 융합 과정에서 공유되는 물질이나 신호 중 어떤 것이 행동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까요?
• 블롭의 네트워크는 어떻게 환경의 여러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까요?
• 이러한 비신경계 정보처리 방식은 다른 단세포 생물에서도 나타날까요?
• 인간의 인지와 블롭의 비신경계 인지 사이에는 어떤 공통 원리가 존재할까요?
특히 마지막 질문은 생명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학습과 정보처리가 반드시 뇌가 등장한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지’의 기원은 훨씬 오래된 생명의 역사 속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5. 블롭은 똑똑한 생물일까?
아직은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리기 어렵습니다.
블롭이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의식이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점액질 덩어리라고만 부르기에도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미로에서 효율적인 경로를 형성하고, 먹이의 위치에 따라 몸의 네트워크를 바꾸며, 반복적인 자극에 행동을 변화시키는 현상은 분명 관찰됐습니다.
그리고 서로 융합한 뒤 한쪽에서 형성된 적응 행동이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현상까지 보고됐습니다.
그래서 블롭은 인간에게 ‘정답’을 주는 생물이 아니라 질문을 바꾸게 만드는 생물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흔히 지능을 뇌와 연결하고, 기억을 신경세포와 연결하며, 학습을 동물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반드시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6. 마지막 질문
다시 처음의 노란색 점액질 생물을 떠올려보겠습니다.
‘눈도 없습니다.’
‘뇌도 없습니다 .’
‘신경세포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탐색하고, 먹이를 찾아가고, 자신의 몸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경험이 이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까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블롭과 융합했을 때입니다.
한쪽에서 형성된 적응 행동이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현상까지 관찰됐습니다.
물론 이것을 인간처럼 서로의 기억을 읽고 복사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물이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큽니다.
아니면 기억이란 과거의 정보가 어떤 형태로든 몸에 남아 미래의 행동을 바꾸는 현상일까요?
그리고 만약 한 생물의 경험이 다른 생물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디까지 ‘기억의 전달’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직 우리는 이 질문에 완벽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블롭을 연구하는 가장 흥미로운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생명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세포조차 아직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뇌가 없는 생물도 환경을 탐색하고, 경험에 따라 행동을 바꾸며, 서로 융합하면서 적응된 행동이 전달되는 현상까지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생명의 정보처리 방식은 얼마나 더 다양할까요?
어쩌면 기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 탐험은 어쩌면 더 이상한 질문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생각’의 가장 작은 단위는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참고 자료
- Nature — Maze-solving by an amoeboid organism
- Nature — How brainless slime molds redefine intelligence
-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 Habituation in non-neural organisms: evidence from slime moulds
-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 Direct transfer of learned behaviour via cell fusion in non-neural organisms
- PNAS — Encoding memory in tube diameter hierarchy of living flow network
- PNAS — Missing evidence for memory in the monocellular slime mold
- Scientific Reports — Towards a Physarum learning chip



